오랜 친구 지웅이에게.
시간 잘 가, 그치? 벌써 18년이 되어가는구먼. 그저 같은 대학 전공을 선택한 새내기들이었는데. 딱히 취미가 겹치는 것도 아니고, 내가 탈脫건축을 하는 바람에 일하는 곳도 달라졌고, 나는 먼저 결혼에 골인해 애까지 가졌잖아. 한껏 다른 세계에 살면서 이렇게 오랫동안 이어질 수 있다니, 둘 다 별생각 없는 녀석들이었나 봐. 몇 달 연락 없어도 '알아서 잘 살고 있겠거니' 하고, 문득 계절이 바뀌는 소리에 "찌웅쓰~ 잘 살고 있니" 하며 얼굴 보는 걸 10년 넘게 했으니 말이지.
띄엄띄엄 만나면 어색할 법도 한데, 우리는 만나서 무슨 얘기를 했던 걸까? 적당히 날을 잡고, 대충 중간에서 만나, 근처 음식점에 들어가 배를 채운 다음, 소화나 시킬 겸 하염없이 걷다가, 다리 아프면 카페 가서 초콜릿 케익이나 하나 먹고, 바이바이 하고 집으로 가는 게 우리의 일반적인 만남이었지. 작년 봄은 고속터미널에서 여의도까지였지? 정작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따듯한 꽃바람과 길을 따라 끝없이 이야기하던 우리의 모습이 떠오르네. 이런 거 너한테 물어보면 딱인데. 네가 또 디테일은 기가 막히게 잘 기억하잖아.
그날도 돈가스 얘기 했으려나. 매번 네가 놀리는 레퍼토리 몇 개 있잖아. 이젠 나도 외울 정도라고. 1학년을 마치고 나는 바로 군대를 갔고 너는 계속 수업을 들었지. 한참 구르다 휴가를 나와 우리는 종로에서 만났어. 토마토김밥인가, 프랜차이즈 분식집에서 점심을 먹었고. 나는 돈가스 정식 같은 걸 시켰나 봐. 보나 마나 군대가 얼마나 신기한 곳인지 열변을 토하며 먹었겠지. 그리고 불쌍한 군바리는 옆 테이블 손님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돈가스 시체만 남은 접시에 흥건한 갈색 소스를 혓바닥으로 싹싹 핥아먹었다는 얘기, 맞지? 여전히 많이 좋아하긴 해. 지금도 집 냉장고 날개엔 경양식 돈가스 소스가 꽂혀있거든. 가끔 맨밥에 뿌려먹는 상상도 하고. 조금 식은 된밥이면 더할 나위 없지. 그래야 밥알 사이사이로 소스가 잘 스며드니까. 이렇게 보니 진짜 핥았을 것 같기도 하고.
모든 게 빠르고 넘쳐 금방 잊혀지는 이 시대에서 오랫동안 무언가를 기억하는 건 멋지다고 생각해. 돈가스 소스를 마셨건 핥았건 뭐든 어때. 네가 하나의 의미로 기억하고 있잖아. 고맙다.
낯이 많이 간지럽구먼. 알잖아, 우리 사이. 이런 편지 따윈 어울리지 않는 거. 그래, 너는 절대 쓰지 않을 게 분명하니 나라도 이렇게 써보는 거지. 소중한 너의 결혼을 축하하며 너의 의미를 떠올리고 싶었거든.
오글거리는 말은 이 정도면 된 것 같으니 이제 선배 유부남으로서 훈화 말씀을 몇 마디 해볼까. 회사에서도 5년 차 선배면 한창 날아다니는 대리급인 거 알지? 하하하.
가장 먼저, 행복해라. 어떻게 행복할 수 있냐고? 사소한 일을 잘 다루면 되더라. 장인어른도 검증해 주셨다. 발 걸려 넘어지는 건 작은 돌부리라고, 큰 바위는 돌아갈 테니. 사소한 서운한 일들 있지. 지나고 보면 정말 별거 없어. 100% 사소해서 기억도 안 날껄. 그런데 그걸 붙들고 있으면 한없이 커지더라. 그리고 그게… 빵! 시작은 별 것도 아닌 일이었는데, 결국 바꿀 수 없는 씁쓸한 추억이 돼버리는 거지. 잠깐 멈췄더라면,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더라면, 그깟 감정 기억도 안 났을 텐데.
하지만 마음은 서운한 걸 어떡하냐고? 진지한 말을 농담처럼 하는 법을 익히는 걸 추천한다. 마음속에 꽁꽁 담다 보면, 어느 순간부턴 담긴 서운함 보다, 그렇게 담기만 하는 내 모습이 나를 더 힘들게 하더라. 그러니까 말해야 해. 그런데 중요한 건, 서운한 마음을 무겁게 얘기하면 안 된다는 거지. 익살맞게 능청을 부리든 귀엽게 애교를 부리든, 부드럽게 네 마음을 전해 봐. 말이 무거우면 듣는 사람은 지레 겁을 먹고 마음의 문을 한껏 좁혀버리거든. "그랬구나", "나는 이래서 그랬던 건데", "미안해", "아냐 내가 더 미안해", "우리 앞으로는 잘해보자!" 하고 넘어갈 것도 '논쟁'이 되어버리는 거지. 결국 우리가 바라는 건 이 서운함과 힘듦을 그 사람이 알아줬으면 하는 거잖아? 가볍게 너의 마음을 풀어놔 봐. 고작 사소한 서운함이잖아. 심각하게 가지 말자구. 너를 사랑하는 사람인데 그거 하나 못 들어주겠니.
사소한 건 서운함만 있는 게 아니지. 사소하게 사랑하는 일들을 놓치지 마. "보고 싶어", "여보가 최고야", "난 네가 정말 좋아", "여보를 만나 정말 다행이야" 그냥 입에 달고 사는 거야. 숨 쉬듯이, 시도 때도 없이, 생각날 때마다. 딸랑 카톡 한 통이 됐건, 오다 주웠다 같은 느낌이 됐건, 그냥 말하고 표현해. 그 사람이 좋을 때마다 직구 날려버리라고. 연애도 아니고 이제 이것저것 잴 거 없잖아? 말의 씨를 마구 심는 거지, 그냥 마음의 밭에 들이붓는 거야. 그러다 보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이 고맙게 되더라.
부모님은 더 좋은 곳으로, 자식은 더 넓은 세상으로, 언젠가 다 떠나간다잖아. 결국 늘 네 옆을 지켜줄 사람은 지금 네가 가장 사랑하는 그 사람이라는 거 잊지 말고. 살가운 애정표현에서 한 세 광년 정도 떨어져 있는 너겠지만, 너의 피앙세를 믿고 너의 좋은 마음, 좋아하는 마음을 자주 전해봐. 믿어준 만큼 더 큰 믿음과 행복으로 돌아오더라.
너의 짝을 만난 걸 축하하고, 삶의 새로운 여정에 들어선 것도 축하한다.
행복과 여유가 너희 둘에게 깃들길 바라며.
꽃바람이 불어오면 돈가스나 한 번 먹자구.
24년 10월 5일
너의 오랜 친구 만덕.
p.s 답장은 안 보내도 돼. 그 시간 있으면 피앙세에게나 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