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해든,
내일이면 주말이라는 생각에 자꾸만 손에서 일이 미끄러지는 금요일 오후 5시. 너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어린이집 하원은 했을 테고, 병원에 갔을까? 점심 먹기 전 네 엄마와 통화하니 오늘은 병원에 간다고 하던데. 열은 없으니 네가 좋아하는 딸기맛 코미 시럽만 받아오려나. 네 엄마를 닮아 벌써부터 비염으로 킁킁대는 우리 강아지. 콧물이 삐져나온 코로 씩씩하게 놀고 있는 사진을 보니 웃기더라. 같이 그네도 타고 숨바꼭질도 하고 싶은데. 미끄럼틀 뒤에 숨어 몰래 볼 수만 있어도 좋을 텐데. 너의 시간에 함께 할 수 없음이 아쉽다. 너의 시간에 함께 하기 위해 함께 할 수 없다는 이 아이러니가. 이렇게 점점이 너의 시간을 그려봐.
아쉬움이 고마울 때도 있어. 주말 아침, 너와 침대에서 뒹굴 때면 더 자고 싶기도 하고, 핸드폰에 눈이 가기도 해. 그럴 때면 '아차차, 이 얼마 되지도 않는 시간, 이럴 때냐.' 하고 비상벨을 울리는 거지. 네 눈동자를 한 번이라도 더, 네 이야기를 한 마디라도 더 듣는 게 좋았어. 네 옆에 있는 순간만은 온통 너를 바라보고 싶으니까.
저번 편지 기억나니? 아빠의 시간을 전해주고 싶다는 말. 비록 너의 시간은 함께 하지 못하지만, 짬짬이 아빠의 시간을 남기고 싶었어. 혹시 네가 나중에 궁금해 할 수도 있으니까. '아빠가 살던 옛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엄마는 맨날 나랑 같이 놀았는데, 아빠는 뭐 하고 있었을까?'. 이런 물음이 떠오를 때, 이 편지들이 네 스케치북에 붙여질 색종이 조각이 된다면 기쁠 것 같아.
어디부터 얘기하면 좋을까 하다 옛날 얘기를 먼저 해보려 해. 아빠의 어릴 적, 그러니까 왕할머니와 왕-왕할머니도 같이 계시던 진짜 옛날 말이지. 긴 시간만큼이나 많은 것이 변했어. 여전히 남아있는 것들이 놀라울 만큼. 여린 별빛이 흔들리는 새벽 가마솥에 소여물을 끓이고, 네가 껌뻑 갈만한 커다란 빨간색 트랙터를 타고 논을 일구던 왕할아버지는 이제 툇마루에 앉아 가만히 마당을 바라보고 계시고, 참새 떼로 북적이던 창고와, 과일이며 떡으로 가득했던 광에는 차분한 공기만 남았지. 올봄에도 제비가 날아왔을까?
너와 떨어져 있는 이 순간처럼, 지나버린 아빠의 옛 추억도 담백한 그리움으로 물들어 있어. 놀이터의 너, 시골 청룡마을, 모두 붙잡을 수 없는 강물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모든 강물에 나를 담글 수는 없겠지. 초등학교 숙제로 네 할아버지가 적어 준 가훈이 떠올라.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하자". 아빠가 뛰어들었던 그 강물의 수위와, 여울짐, 따스함을 담아 네게 전해. 두 번 다시 오지 않기에 더 소중한 그 강물의 기억이 사붓사붓 네게 물들었으면 좋겠다.
오후 2시에 출발한 고속버스는 새벽 4시가 되어서야 광주 터미널에 도착했다. 택시 승강장엔 길게 늘어선 미등이 밤을 물들였다. 코 끝이 바람에 에였다. 기사들은 차 안에 한껏 몸을 구겨 넣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차창을 두드리니 손가락 두어 마디만큼 창이 내려갔다. 시외로 나가야 할 행선지에 기사는 미터기를 못 켠다고 몇 차례 흥정을 해야 했다. 가죽 시트는 퍽 닳아 반질거렸다. 담배 절은 냄새가 콧 속으로 스며들었다. 택시 안은 낮은 라디오 소리와 눅눅한 온풍으로 가득했다. 운전석과 조수석 머리 받침대엔 싸구려 향나무 구슬시트가 매여있었다. 조그만 손은 염주 굴리듯 알알이 꿰인 갈색 목구슬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나릿한 트로트를 따라 네온등이 멀어졌다.
터미널 밖 사거리는 고요했다. 택시는 몇 번의 빨간 신호등을 무시하고 말없이 도로를 달렸다. 룸미러에 매달린 연꽃 장식은 이리저리 부드럽게 움직였다. 글로브 박스 위 그림자의 행렬은 끝없이 기울어졌다. 낡은 필름지엔 노란 잉크가 다 날아가버린 택시 면허증이 꽂혀 있었다. 둥글넙데데하게 늘어난 증명사진과, '노옥만'같은 이름과,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찍힌 발급일자를 쫓던 눈은 천천히 잠에 빠져 들었다.
택시는 이내 도시를 벗어났다. 창밖으로 밤이 끝없이 펼쳐졌다. 저 멀리 점점이 찍힌 불빛들만 반짝거렸다.
달칵, 택시 문을 여니 사늘한 공기가 얼굴에 내려앉았다. 눈앞으로 사라지는 입김을 뒤로하고 누런 가로등 불이 비치는 골목을 걸었다. 아직 남은 달콤한 잠과 온기를 붙잡으려 잠바 속으로 팔짱을 꼭 꼈다. 슬며시 부는 바람에 빈 소매가 팔랑였다. 멀찍이 어깨에 짐보따리를 얹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아빠를 쫓았다. 자박자박 발걸음에 개 짖는 소리가 밤을 깨웠다.
청록빛 철문의 자물쇠 걸이엔 빙글뱅글 감긴 녹슨 철사가 걸려있었다. 끼이익— 문은 느린 소리를 내며 열렸다. 마당은 흰 달빛이 가득했다. 선잠만 주무셨는지 반쯤 열린 세살문 앞 툇마루엔 할아버지가 앉아계셨다. "우리 강아지들 왔는가." 부벼지는 할머니의 볼에서 따듯한 청주 향이 났다. 웃방 아랫목은 군불로 펄펄 끓었다. 아이와 동생은 원앙인지 꿩인지, 노랑 바탕 위 새 두 마리가 수 놓인 솜이불로 쏙 들어갔다. 아이는 무거운 기분 좋음을 느꼈다. 초록빛 말이 너른 논을 달리는 꿈을 꾸었다.
24년 11월 15일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