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에게,
어때, 할만하냐? 마음을 담는 일 말이야. 그래도 레버 돌리는 건 제법 익숙해진 것 같던데. 한 달 전만 해도 허구한 날 낑낑대더니 이제 속도 좀 붙일 줄 안다고 좋아서 신나게 돌리는 모습이 귀엽더라. 비슷비슷하니 토씨만, 순서만 다른 문장들을 매번 열댓 개씩 쓰는 건 웃기는 일이긴 해. 어제는 이 단어가 마음에 들었다가, 오늘은 그저께 쓴 단어가 좋아 보이고, 한참 쓰다 올라와 다시 읽으면 더 괜찮은 글귀가 튀어나오고. 도무지 나가지 않는 진도를 보면 속에서 막 천불이 나지?
토씨 정도 바꿔서 해결되면 양반이지. 마지막 문장을 어떻게든 끼워보려다 안 돼 앞 문장을 잡아당겼더니 줄줄이 실밥처럼 모든 문장이 뜯겨나가는 광경을 바라보던 너의 표정이란. 결국 은근슬쩍 덮지도 못해서 문단을 통째로 들어내고 처음부터 한 올씩 다시 꿰던, 금방이라도 질질 울 것 같은 너의 얼굴은 정말 멋졌지. 들어낸 그 누더기 버리지도 않고 서랍 속에 고이 넣어 놓았더라. 중고 문단으로 내다 팔지도 못할 거 '언젠가 쓰일 날이 있을 거야…' 하는 너의 천진난만한 희망사항이란.
그런 말 있잖아. <감정을 살코기처럼 따로 잘라내어 저울에 달고 자로 재어 숫자로 계산한 다음, 그 수치에 맞게끔 정확하고도 구체적인 표현을 찾아 쓰도록 하라>*. 뭉티기도 아니고, 마음에 딱 맞는 표현을 찾지 못해 자학하던 날이 한두 번이었니. 소 뒷걸음질 치듯 사전을 뒤지다 번쩍하고 단어를 밟는 날은 운수대통인 날이지. 그날 복권을 샀었어야 했는데. 단어는 운칠기삼이라 쳐. 흐름이나 짜임새처럼 본 실력이 드러나는 곳은 말 다했지. 형편없는 필력에 성불한 독자 줄 세우면 집에서 양화대교까지 갔겠다. 반은 눈 감고 써놓고선 읽는 사람이 찰떡같이 너의 마음을 알아주길 기도하는 모습이라니. 따봉.
요령 피울 생각 말고 기초 체력이나 잘 키워. 한 문장에 한 생각만, 군더더기는 빼고, 어려운 말은 금지야. 글이 밋밋해도 어쩔 수 없어. 지금은 짧고 명확하게 표현하는데 집중해. 마음이란 녀석이 좀 뿌옇냐. 한 방에 다 담아보겠다고 잠자리채 휘두르듯 마구잡이로 써봐라, 네 마음도 내 마음도 아닌 짬뽕만 나오지. 열심히 문장을 잘라도 짜임새가 거칠어 읽기 힘든데, 문장까지 길면 오죽하겠어. 잘 자르고, 살뜰히 써. 살살, 배식으로 연두부가 나왔는데 젓가락 밖에 없다는 각오로 쓰라고. 글 짜임새나 전략은 통 크게 양보할게. 아직 어려울 수 있다 치자고. 문장도 열댓 개는 써봐야 뭐가 좋고 별로인지 느껴지는데, 글도 그 정도는 써봐야지. <딱인>, <그럭저럭 봐줄 만한>, <그냥 그런>, <형편없는>, 열댓 개 편지 중 이 글은 어디에 속할지 그때 다시 이야기해보자고.
재밌어하는 것 같아 보기는 좋다. 시간 잘 가잖아. 몇 번 쓰고 지우니까 울리는 도서관 마감 종소리에 얼마나 썼나 보니, 세 시간 앉아 세 줄 썼네. 장하다. 속도만 보면 노벨문학상 감이야. 좋게 포장하자고. <몰입>이라 이름 붙이는 거지. 어때, 갑자기 멋져 보이고 잘하고 있는 것 같잖아. 뾰족한 지압길을 맨발로 걷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 뭐겠어. 돌이 찌르는지도 모르게 시간을 보내는 거지. '나는 지금 아무 생각이 없다. 걸어야 하니까 걷는 거지 무슨 생각이냐…' <글쓰기는 재능의 결과가 아니라 지난한 노동의 과정>** 이라더라. 지극히 어려운 노력을 들이는 행위라잖아. 시간을 잊는 그 감각, 그 패턴을 잊지 말라고.
잘해봐. 나야 뭐 너와 한 배를 탔으니 발목은 붙잡지 말아야지. 신랄하게, 눈물 쏙 빠지게 말해줘야 정신 차리려나 싶은 생각이 드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지만, 정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네, 안쓰러운 녀석. 여전히 깜깜하긴 해. 뭐가 하나도 보이질 않네. 그래도 누가 그러더라,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을 때 실력이 크는 거라고. 푹 익은 김칫국 맛 한 번 봐볼래? 유명해져서 이리저리 불려 다니고 피할 수 없는 사회적 교류들로 가득한 날들을 상상해 봐. 그럼 지금처럼 세 시간에 세 줄 쓰고 앉아있을 시간이나 있을 것 같아? 지금을 즐겨. 지금이 좋을 때야. 생각은 마음껏, 깊게 하되 불안은 물수제비처럼, 스치듯이 얕게 튀겨 주라고. 실컷 불안에 잠수해 본들 뭐 좋은 문장 나오겠냐. 즐겁게, 늘 진심으로 해보자고. 하기 싫은 마음이 와도 밀고 나갈 수 있게. 꾸준함이 최고라더라. 그래서 이렇게 미리 편지를 써놓는 거니까. 그때가 오면 이걸 다시 읽어보라고.
p.s. 엽서가 아까워 글씨를 작게 씀. 양해 바람.
25년 1월 5일
널 즐겁게 구경 중인 내가.
* 대학에서 배우는 글쓰기(The Writer's Handbook), 윌렛 켐튼(Willett Main Kempton)을 인용한 <글쓰기 만보>, 안정효, 2006
** 소설가 김애란 인터뷰,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