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게 손편지 쓸 때 참고할 문장과 문구

여보와 나, 우리를 닮은 편지가 있다면

사랑하는 여보..!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참으로 어렵구만. 핑계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여보 편지는 정말 잘 쓰고 싶어서 매번 뒤로 미루고만 있었어. 뭐라 해야 할까. 다른 편지보다 몇 배는 더 신경 쓰고 싶고, 그래서 여보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았으면 하니까… 그러다 보니 시작도 못 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만 하다 결국 다른 편지를 쓰고. 그렇게 해든이, 아빠, 태현이, 지웅이, 심지어 나한테까지 편지를 썼건만 여보 편지는 한 통 없는 오늘이 되었네. 미루고 미룬 마음에 떠밀린 용기를 긁어모아 이렇게 컴퓨터 앞에 앉긴 했는데, 이 편지가 무사히 끝을 맺고 여보에게 전해질지 이 문장을 쓰는 지금도 여전히 모르겠어. 쓰다 쓰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이런 편지는 차라리 안 주는 게 낫겠다 싶으면, 그냥 컴퓨터 어디 구석에다 저장해놨다가 한 십 년 뒤쯤, 편지를 썼다는 사실조차 홀라당 까먹었을 즈음, 폴더를 정리하다 우연히 발견하곤 여보에게 이것 좀 보라며, 이런 못난 편지도 썼었다며 웃긴 옛날얘기 하듯 꺼내보려고.

편지의 시작으로 가장 무난한 건 역시 날씨나 안부 이야기겠지. 하지만 나는 특별한 편지가 쓰고 싶었으니까 진부한 오늘 날씨나 안부 물음 따위로 편지를 시작할 수 없었어. 한참을 쓰다 안부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니 그저 여보가 편안히 잘 지내고 있는지, 그 닳고 닳은 안부라는 건 퍽 중요한 것이었구만, 하고 뒤늦은 생각을 해. 점심 먹으러 회사를 나설 때마다 여보에게 전화를 걸어 밥은 챙겨 먹었는지, 해든이 등원은 잘 시켰는지, 별일 없었는지, 오후에는 뭐 할 건지, 일주일에 다섯 번은 똑같은 레퍼토리의 질문을 하고, 일주일에 세 번은 소파에 누워 전화를 받는 여보는 오늘도 그냥 누워있었지 뭐 했겠냐며, 매번 같은 대답을 하는 일이 창피하다고 삐죽였지. 그럼에도 매일 전화를 하고 똑같은 안부를 묻는 건, 잔잔히 물결치는 파도처럼 별일 없이 일렁이는 여보와의 시간 속에 나의 행복이 있기 때문일 거야. 좋은 삶이란 화려함과 특별함으로 가득한 날이 아닌 별것도 없는, 시답지 않은 그 안부들이 모인 것일 테니. 이 편지에 담지 못한 여보의 안부들이 언제나 내 마음 한 가운데에 머물고 있음을 알아주길.

글쓰기 책에서 이런 걸 배웠어. 잘 쓴 글이란 하나의 주제만을 말하는 글이다. 하나의 주제를 정하고 글을 쓰는 것이 어렵다면, 제목을 먼저 짓고 글을 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아무래도 이 편지가 잘 쓴 글이 되긴 글러 먹은 것 같아. 나는 여보에게 어떤 말이 하고 싶었던 걸까. <사랑은 얼마나 비효율적인 일인가?>, <나는 역시 너를 사랑하는군, 이라 생각한 이유>… 여보와의 시간 속에서 틈틈이 모은 메모를 뒤적여도 보고, 하릴없이 내리는 싸락눈을 보며 여보의 시간도 그려 보고. 포스트잇이며 냅킨에다 쓴 자잘한 친구들까지 치면 썩 많은 편지를 여보에게 썼건만, 진지하게 쓰는 첫 편지라 생각하니 도무지 이거다 싶은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네. <결국 이도 저도 아닌 말만 쓴 편지>. 울며 겨자 먹듯 제목도 붙여봤지만 어쩌나. 말에는 힘이 있어 말하는 대로 된다는 이야기가 진짜였는지 제목대로 글이 흘러가는 모습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의 모습은 늘 그러했어. 별것도 없이, 이렁저렁, 적당히 되는대로. 그것이 대화라면 이 얘기하다 저 얘기하고. 실컷 낄낄대놓고선 우리 무슨 얘기 했더라, 하고 떠올리면 별 실없는 얘기들로 가득하고. 산책은 어떤데. 햇살이 눈 부신 길로,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때마침 초록 신호가 켜지는 곳으로. 기필코 해야겠다는 것도 없고, 찾아간 우동집에 생면이 다 떨어져 우동을 못 먹게 된다 한들 딱히 아쉬워하지도 않는. 그럴수도있지. 이참에 왕돈가스나 먹는 거지 뭐.

편지에 생김새가 있어 우리를 닮은 편지가 있다면 그건 그냥 흘러가는 대로, 마음이 이끄는 선을 따라 쓰였을지도 몰라. 그저 못 쓴 글이어서 그런지 눈 없는 지렁이처럼 써서 그런지 이도 저도 아닌 편지가 되어버렸지만, 우리를 닮았다고 생각하니 첫 편지로 썩 나쁘진 않으려나, 하는 팔자 편한 생각을 해봐. 비록 매일 새롭게 물드는 여보를 향한 사랑이며 가슴 속에 여보를 넣고 함께 보고 싶은 순간들은 하나도 담지 못했지만… 그 <이렁저렁>이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자, 별것 없이도 행복했던 우리의 시간 그 자체일 테니까. 마음이나 삶이나, 정해진 건 아무 것도 없고 딱히 정할 것도 없고. 그저 흘러가는 것이고, 어디로 갈지 그곳에서 또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를 테지. 그럼에도 두근거림을 손에 쥐고 부드러운 시간에 몸을 맡길 수 있었던 건, 여보가 옆에 있어서야. 어쩜 그리 가는 곳마다 햇살이 비치고, 길은 따스함으로 물들어있던지. 단 한 번의 후회도 없었어. 고마워.

이 편지의 마지막은 어때야 할까. 제목도 고쳐봤어. 여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다시 쭉 읽어 봐. 결국 못 쓴 글이 되었네. 아쉽긴 하지만 뭐 어때. 세상에 잘 쓴 글만 있을 순 없겠지. 못 쓴 글도 있어야 잘 쓴 글이 박수받고 그러는 거 아니겠어. 우리도 똑같으려나. 뭐 얼마나 뛰어나고, 얼마나 멋진 삶을 살겠다고. 그냥저냥 여보, 해든이, 우리 가족, 오늘 하루 등 따숩고 배부르면 좋은 걸. 우리를 닮았다고 하니 정들었나 봐. 그럭저럭 여보에게 전해 줄만 한 것 같기도 하고. 기껏 쓴 얼개와는 한참 달라져 버렸긴 해. 이래서 글쓰기가 삶 같다는 얘길 하나 봐. 이곳에 오니 이제야 진짜 결말을 만나네. 재밌다. 쓰면서 많이 행복했어. 매번 함께하는 주말이었지만, 열심히 써본다고 이번 일요일은 여보와 해든이 둘만 놀았네. 다음 주는 같이 놀자. 편지도 좋지만 함께하는 순간만 하겠어. 곧 우리에게 찾아 올 가을이까지. 또 우리는 새로운 시간들을 향해 가는구나.

여보가 옆에 있어서 좋아.

25년 2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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