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가을이에게.
안녕 가을아.
가을에 찾아와 가을이야. 조금 성의 없지?
네 형은 하임이었어. 내가 <초코하임> 과자를 좋아했거든. 네 엄마와 나, 둘 다 썩 괜찮은 태명이라 생각했어. 하이마, 하이미. 귀엽게 뒤로 넘어가는 ㅁ도 좋았고.
너에게도 멋진 태명을 지어주고 싶었는데.
어영부영 가을이가 됐구만.
뭐로 하지, 있긴 있어야 할 텐데. 몇 번을 미루다 떠밀리듯, 네가 온 계절이 네게로 갔지.
순하게 자라라고 순자, 단단하라고 철이. 가을에 와 가을이. 촌스러워도 의미라도 있는 태명이 더 나았을까. 고작 담긴 건 계절뿐이라니.
네 형에게 물어보기도 했어. 동생 이름은 뭐가 좋을까? 이상해도 잘 살리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싶었지. 하지만 그의 안은 하츄핑이었고, 쉽지 않더라.
내가 더 많이 고민했다면 어땠을까. 지금도 늦지 않았지만…
그러게, 참. 이런 게 미안함으로 다가와.
사랑한다는 건 같이 있는다는 거겠지. 진짜로 옆에 있든 마음속에 있든.
많이 사랑한다는 건, 오래 머무르는 일일테고.
나는 네 엄마와 형을 많이 사랑한단다. 많이 사랑하려 애쓰고.
그렇기에 너를 생각하는 마음 한편에는 늘 미안함이 자리해. 네 형에겐 이만큼 생각했는데, 저만큼 머물렀는데. 그 기억의 책장들이 자꾸만 팔랑거려서.
그땐 그랬어. 밤이면 작은 등을 켜고 침대에 누웠고, 알맞게 데운 우유를 닮은 음악도 틀었지. 손바닥만 한 이불 위에 온 세상이 있었어. 그 고운 부드러움 속에 둘, 그리고 셋뿐이었지. 볼록한 배에 대고 말도 걸어 보고, 손으로 쓰다듬어도 보고. 살갗 위 꿈지럭대는 발짓 하나에도 가슴이 설렜어. 온통 네 형에 대한 생각뿐이었지.
지난 가을 네가 찾아오고 금세 여섯 달이 흘렀어. 정신없는 행복들 속에 문득 생각을 하지. 가을이, 가을이는 너무 신경을 못 써주는 게 아닐까.
다 핑계겠지만,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가. 너에게 말 한마디 못 해준 날도 너무 많지.
혹시나 네가 외로웠을까 봐. 너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을 것만 같아서. 귀라도 자주 대어주었더라면. 아니면 네 이름이라도 더 많이 불러볼껄.
같은 밤이 오지만, 안방의 풍경은 퍽 달라졌어.
침대는 난리통이야. 방방, 로션도 안 바른 깨복쟁이는 쉬지 않고 뛰지. 인형들은 날아다니고, 이불 속에 숨었다 나왔다, 노래를 불렀다 춤을 췄다가. 예순두 번 정도 베개에 점프를 하고 나면 책 한 무더기를 읽어달라고 가져와. 어제도 읽은 책인데. 또 읽어도 그리 재밌는지.
웅얼웅얼 책 읽는 소리가 잠잠해지고 살며시 방문이 열려. 축 늘어진 젖은 행주 같은 네 엄마가 나오지. 그날따라 늦게 잠든 날이면 성난 행주가 되기도 하지만…
단둘이 보내던 밤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이가 시릴 만큼 차가운 맥주 한 모금을 상상해. 하지만 내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될 텐데. 시무룩한 마음으로 우리는 서둘러 곯아떨어질 준비를 하지.
살금살금 불이 꺼진 방으로 다시 들어가. 이불을 덮고, 오늘은 별일 없었는지, 겨우 몇 마디 안부를 물어. 눈을 감은 채 하루 종일 만져보지 못한 손이나 몇 번 만지작대다 보면 금세 잠이 와. 그렇게 또 아침이 되고.
구차한 변명이 구질구질하지. 그거 잠들기 전에 한 번 보듬어 줄 수 있었을 텐데.
맏이들은 평생 동생의 마음을 모를 테지. 그들이 여기 왔을 때, 오직 그들뿐이었으니. 세상 모든 사람이 그지없는 반가움으로 그들을 바라보았을 테니.
땡감 같은 우연에 입이 떫다. 네 엄마와 나, 모두 맏이기 때문이지. 네 형같이 너를 사랑하고 싶은데. 내가 너를 어디까지,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네가 헤쳐갈 근원의 세계는 형이 있는, 한 차례 파도가 지나간 세상일 텐데.
둘 중 한 명이라도 맏이가 아니었더라면. 네게 필요한 위안과 너의 작은 감정에도 금방 가슴이 울렁일텐데.
누군가 내게 널 사랑하냐 물으면 그렇다 말하겠지. 하지만 내가 널 많이 사랑하냐 물으면 나는 어디론가 숨어버려야 할 거야. 너의 곁에도, 마음속에도, 어느 한 곳에도 오래 머물지 않았으니.
부모란 지지부진 굽어진 길일 테지. 부모의 모든 도리며 자격이 임신확인서에 동봉되어 오지 않기에. 나란 사람은 그대로인데. 새로운 생명만 품에 띡, 하고 들어온 것일 테니.
그렇기에 나는 생각해야 하지. 부모란 어때야 할까.
그리고 내가 만든 그 모습을 향해 내 자신을 내던지지. 네 형이 오고, 크며, 나도 같이 자란 것처럼.
가을, 네가 우리에게 왔고. 이제 나는 무엇이 자식 여럿을 둔 부모를 만드는지 생각해. 한 번도 고민해 본 적 없던, 달라져야 할 부모의 도리를. 나는 더 아픈 손가락이 없게 할 거야. 설령 그 아픔과 기쁨이 완벽히 똑같을 수 없더라도. 기울어진 아픔이 아물 수 있게 더 사랑하는 일. 그것이 도리라면 좋겠어.
같은 강물이 두 번 흐를 수는 없겠지. 네 형이 뱃속에서 헤엄치던, 사 년도 더 된 강줄기는 흔적만 남았어. 조금은 관심도 적어졌을 테고. 너의 모든 성취는 이미 본 것들일 수도 있어. 네 탐색과 발견의 대부분에 형이 끼어들지도 모르지. 선택과 놀라움 대신, 비교와 익숙함이 자리하겠지.
그렇기에 나는 너를 더 각별히 사랑하려고. 유달리 네 곁에 더 오래 머무르려고. 너는 나와 더 다를 것이기에, 네 속삭임에 더 바싹 귀를 가져다 대고. 그 어떤 것보다 조심스럽게, 작은 새를 손에 쥔 것처럼 너를 쓰다듬어 보려고.
강의 시작에 어떤 불꽃이 있을 것이다.
언제나 한결같이 타오르는 불꽃이 있을 것이다.
땔감도 없이 타오르는 그 불꽃에서.
오늘도, 내일도, 그지없이 물줄기가 흘러내릴 것이다.
25년 2월 7일
너의 곁에 더 오래 머무르려는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