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분들께
짙은 분홍을 담은 눈싸라기들이 나뭇가지 위에 내려앉아 있습니다. 공원의 잔디는 누르튀튀하지도, 그렇다고 푸릇하지도 않은 기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 멀리 목련꽃 등불이 점점이 켜져 있습니다. 이곳은 주변에 높은 건물이 없어 그늘이 들지 않습니다. 바람은 언뜻 써늘하나 벗겨지는 이마며 볼따구에 쏟아지는 햇볕이 따닷하니 퍽 좋습니다. 살구색으로 눈꺼풀을 찌르고 들어오는 햇살에 눈알을 위로 뒤집어 봅니다. 요 며칠 쓰잘데기 없는 몸살 기운에 비실거리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가려주는 것 없이 태양 아래 있으니 생명력 같은 것이라도 좀 전해지는지, 기운이 나는 듯합니다.
예, 안녕하십니까. 로만덕입니다.
서울에서 태어나 여전히 서울에 살고 있습니다. 이제 한 얼마냐 서른여섯 정도 된 것 같습니다. 나이를 어떻게 세야 할지 잘 모릅니다. 89년에 태어났습니다.
어제 와이프와 둘째 초음파를 보고 왔습니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초음파실은 어두컴컴하니 아늑했습니다. 가을이(둘째)가 얼굴을 잘 안 보여줘 숙현이가 이리 누웠다 저리 누웠다 하는 동안 깜빡 졸 뻔했습니다. 7월이면 숟가락이 하나 더 늘어난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퍽 아득해집니다. 둘이라니, 진짜 잘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요즘 자주 하는 생각 중에 <작품>이라는 게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작품을 만듭니다. 빈 과자 봉지로 접은 딱지도 작품. 무릎에 사 어깨에 판 성공적인 주식 매매도 작품. 예약 손님이 미용실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 내가 지은 표정부터, 물 흐르듯이 사각대는 숱 가위와 바리깡, 계산을 마치고 자연스럽게 건넨 배웅 인사 멘트까지, 내가 만든 일련의 과정도 하나의 작품.
주말 아침 대충 때려 넣고 만든 간장계란비빔밥이며, 걷는 속도를 기가 맥히게 조절해 횡단보도 신호를 한 번도 기다리지 않고 목적지에 도달하는 일이며. 지극히 제각각인 작품을 분류하긴 어려울 테죠. 그럼에도 우리 모두가 작업 중인 작품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나 자신과 그 시간일 겁니다.
오져 버리는 정도는 아니긴 한데 어찌저찌 잘 만들고 있습니다. 삶도 그렇고 저란 녀석도 그렇고 말입니다. 독자분들은 좋은 작품 만들고 계십니까.
편지를 쓰다 보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원래 잡생각이 많긴 했습니다. 담배에 누렇게 절어버린 노트북에 많이도 적었죠. 샀을 때는 새하얬는데. 덕분에 타자는 잘 칩니다. 구조도 흐름도 명료함도 아름다움도 없는 글자와 물음표의 행렬이었지만 신나게 쳤습니다. 아,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지금은 고삼차 같은 행복…
편지를 쓰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나란 녀석, 내 시간 잘 쪼물락거리고 있나 돌아보기도 합니다. 거진 그 끝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는 일이 작품을 좋게 만드는 일이구나, 하고 이마를 또 한 번 칩니다. 빳빳한 현금다발은 주지 못하니(미안) 이렇게 마음이라도 써야지 어쩌겠습니까. 다행인 건 착하게 마음먹어서 그런가, 마음이란 녀석도 시간도 잘 자라주는 것 같습니다. 독자분들도 편지 한 번 써보십쇼. 좋습니다.
이상한 소리만 하다 정작 중요한 이야기를 못 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들 바쁠 텐데(슬프게도 우리는 늘 바쁩니다) 소중한 시간을 써서 읽어주시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 시간 아깝지 않게 길도 그만 잃고, 의미 있는 글을 써보도록 정진해보겠습니다.
유물론자는 아니었지만 서른여섯 정도 되어보니 왜 건강, 건강,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독자분들도 꼭 건강하십시오. 마음을 담습니다.
25년 4월 4일
로만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