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살 아들에게 손편지 쓸 때 참고할 문장과 문구

96년을 추억하며 22년생 아들에게 3

부쩍 더 많이 사랑하는 해든,



놀이터 한 편에는 회양목이 오보록이 모여 있다. 다듬은 지는 조금 되었는지 뻗친 가지들이 제멋대로다. 화단에는 잡초가 무성하다. 민들레, 토끼풀, 달개비, 머위… 요 며칠 쏟아진 비에 키가 한 뼘은 더 자란 것 같다. 길쭉한 콘크리트 블록을 따라 조르르 울타리가 세워져 있다. 반원형의 진녹색 울타리는 종아리께 온다. 겹겹이 이어진 조그만 무지개를 닮았다. 화단은 널찍한 평상이 놓인 등나무 그늘로 이어진다. 옹기종기 놓인 노란 벤치와 평상과 등나무 줄기는 넘고 타고 얼음땡하기 좋다. 오늘은 아무도 없다. 너무 더운가 보다.

미끄럼틀을 향해 모래밭을 건너본다. 한낮의 태양에 달궈진 모래알들이 발가락 사이로 뛰어든다. 대양을 가로지르는 범선의 갑판 위로 뛰어드는 해적 같다. 검정 줄무늬 쓰레빠를 벗어 손목에 끼워본다. 앗 뜨거. 몇 발짝 못가 잽싸게 다시 신는다. 이번에는 눈이 부시다. 미끄럼틀 쇠에서 반사된 햇빛이 눈을 찌른다. 많이도 탔는지 쇠가 반질거린다. 파리도 미끄러질 것 같다. 불그죽죽한 계단 손잡이를 잡아본다. 우둘투둘하니 군데군데 칠이 벗겨졌다. 손바닥이 뜨거워 두 발로만 계단을 올라야 한다. 깡 깡 하고 철제 발판 위로 발소리가 울린다.

우리 아파트는 동이 세 개다. 나름 멋을 부린다고 이름은 A, B, C동이다. 동은 옆으로 길쭉하니 널빤지처럼 생겼다. 우리집은 B동 13층 꼭대기다. 위에 노란 곤돌라가 있어 찾기 쉽다. 아파트 한가운데 놓인 네모난 놀이터는 오래된 나무들로 빙 둘러싸여 있다. 알록달록 차들로 채워진 주차장과 A, B, C동은 놀이터와 나무를 감싼다. 미끄럼틀 위에 올라가면 화단 너머 뻥 뚫린 곳으로 아파트 정문이 보인다. 이따금 들리는 붕 소리와 함께 자동차 몇 대가 지나간다. 티코, 프린스, 갤로퍼… 아파트 안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온통 매미 소리뿐이다.

우거진 느티나무 사이로 빛바랜 시계탑을 바라본다. 시계가 고장 난 건 아닐까. 7 위에 서 있는 분침을 노려본다. 아주 조금 움직인 것 같기도 하고. 미끄럼틀이나 타려 반질거리는 쇠 위에 앉아본다. 엉덩이가 데일 것 같다. 쪼그려 앉아 내려오다 탕 탕하고 중간부터는 서서 뛰어 내려온다. 나와 쓰레빠 자국만 모래밭에 놓였다. 애꿎은 모래 한 줌을 쥐어 미끄럼틀을 태워본다. 사라락 굴러내리는 모래알과 돌멩이가 쇠를 울린다. 미끄럼틀을 타지 못한 알갱이 몇 알이 쇠 위에 남았다.

머리가 뜨끈해온다. 머리카락은 바싹 데워진 빗자루 같다. 놀이터 옆 화단 그늘로 도망친다. 바닥에는 송충이를 닮은 열매가 한 가득이다. 회양목 옆에 쪼그려 앉아 손톱만 한 이파리를 하나씩 따 본다. 통통한 잎사귀가 똑 하고 떨어진다. 연녹색 잎이 아스팔트 위에 내려앉는다. 떨어진 잎 사이로 개미 두 마리가 기어간다. 궤적은 햇살 아래 제각기 핀 배롱나무꽃을 닮았다. 개미는 무럭무럭 뻗어 자글거리는 아스팔트 자갈 사이로 스며든다. 정문 사이로 주황색 비닐봉지를 든 엄마가 손을 흔든다. 엄마가 왔다. 엄마아!



시계의 짧은 바늘이 4에 가까워지면 나는 너의 하원을 생각하기 시작해. 너는 오늘 어떤 표정으로 형님반 방에서 달려 나올까. 빨간 가방을 메고, 하마 베개도 꼭 끌어안고, 선생님한테 인사도 하고. 닫히는 문소리와 함께 도토리 굴러가듯 너는 놀이터로 향하겠지. 자주색과 진녹색의 낡은 우레탄 블록이 엇갈린 코딱지만 한 놀이터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고작 있는 거라곤 그네 두 개, 미끄럼틀 한 개, 철봉 세 개, 시소 두 개, 노랑 흔들말 하나뿐인데. 어제도 놀고 그제도 놀았으면서 오늘 또 가고 싶다고 말하는 네가 나는 그저 좋아.

나도 너처럼 놀이터가 좋았나 봐. 엄청, 진짜 많이 좋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퍽 좋아했나 봐. 아빠의 놀이터는 오래전에 없어졌어. 한 이십 년 됐으려나. 아파트 놀이터 사진이 있을까. 있었으면 좋겠는데. 네 할머니한테 한번 물어봐야겠다.

네게 편지를 쓰며 놀이터를 떠올리는 일은 행복했어. 기억 속 묻혀있던 작은 알갱이를 하나씩 꺼내, 조심스레 털고 문지르는 기분 좋은 시간이었지. 초등학교 꼬맹이 시절이었네. 그때는 모든 게 다 커 보였는데. 종종 네 눈을 바라보고 이야기하고 싶어 쪼그려 앉을 때면 놀이터가 훌쩍 커 보여. 네가 보고 뛰는 너의 놀이터를 만나곤 하지. 너는 너의 놀이터를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내 손바닥엔 여전히 매끄러웠던 미끄럼틀 쇠의 촉감이 남아있어.

누군가가 됐건 무엇이 됐건 어디가 됐건, 기억한다는 건 좋은 일일 거야. 한 개의 시간이 끝나도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것 일테니까. 기억하기 위해선 유심히 바라봐야겠지. 정말 그렇지만, 이 순간이 마지막인 것처럼. 그렇기에 나는 너를 더 자세히 보려고. 네 옆에 있을 때면 오직 너만을 바라보고, 너의 순간을 잃어버리지 않게 잠바 안주머니에 꼭꼭 담아두려고.

오늘은 하얗던 목련이 벌써 갈빛으로 온 바닥을 적셔버렸어. 흘러가는 시간을 타고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가는 놀이터, 너, 편지… 동그랗게 모은 두 손바닥에 따스한 반짝거림을 담아 목을 축여봐. 고맙고 사랑한단다.

25년 4월 10일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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