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편지 쓸 때 참고할 문장과 문구

소개받은 이성에게 정중한 거절 편지를 쓰는 방법

안타깝게도 소개받은 이성이 모두 덱스나 박보검일 수는 없는 일이다. 파스타를 먹고 커피를 마신 뒤 조심히 들어가라는 인사치레가 끝나면,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서부터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골치가 쑤시기 시작한다. 영영 주선자를 안 볼 게 아니라면 그의 면을 생각해서라도 상대에게 거절 의사를 전하는 것이 사교계의 통상적인 예절이기 때문이다.

가장 흔히 사용되는 것은 메신저를 통한 짤막한 거절 메시지다. 아무개 씨는 좋은 분이지만 인연이 아닌 것 같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날 것이다 운운. 대체로 무미건조하고 효율적인 한국 사회를 잘 반영한 방식이다. 본고의 목적은 판에 박힌 이러한 거절 대신 정중하게 쓰인 거절 편지가 왜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수 있는지 설명하자는 것이다. 모두가 닫히는 문을 잡아주지 않는 나라에서는 문만 잡아줘도 정체성이 생기는 법이다. 효율을 숭상하는 시대일수록 과잉이 도드라질 수밖에 없다.

정중한 거절 편지로 얻을 수 있는 첫 번째 이점은 당신이 사교계의 암묵적인 도리를 지키는 신사숙녀임을 자연스럽게 입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연애가 그러하듯 주선과 만남 또한 직렬 처리가 불문율이다(다만 작업 간격에 대해서는 상이한 척도가 적용된다). 수성부터 해왕성까지 태양계의 모든 행성이 일렬로 늘어서듯 일평생 없던 소개가 한날한시에 몰린 기구한 팔자의 주인공이 아니라면 여러 상대를 병렬로 만나는 것은 평판에 좋지 않다.

비싼 시간과 자원을 들여 오직 그를 위한 거절 편지를 썼다는 것은 <나의 시간 축 위에는 당신밖에 없었습니다> 라고 은연중에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소상히 쓰인 거절 편지를 받더라도 너무 상심할 필요는 없다. 적어도 효율을 위해 어망에 쏟아부어진 물고기 중 하나는 아니었음을 방증하기 때문이다.

만약 남자 다섯을 동시에 만나며 그들 모두에게 손으로 눌러쓴 거절 편지를 보낸 이가 있다면, 그는 오히려 칭찬받아야 마땅하다. 우리는 모든 이를 한결같이 사랑하는 자를 성인이라 부른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도 쉽지 않은 세상에서 별것도 없는 거절을 위해 편지 다섯 통을 작성한 사람은 성인의 자질을 가진 자이다. 연필 다섯 자루와 지우개 두 개로 수많은 남자를 구하는 예수와 같다.

두 번째 이점은 만년필이나 편지지 같은 문방구에 대한 당신의 품위 있는 취향을 은밀히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거절 편지에 국제 소포로 어렵게 구한 <루나리안 블루> 잉크를 사용했다고 상상해 보라. 자정의 심연을 담은 잉크는 푸른 빛 속에 은회색 입자들이 춤추고, 짙은 밤하늘의 고요함을 닮은 감촉은 만년필 끄트머리를 타고 부드럽게 전해진다. 큼직한 가로줄 위로 형광색의 조잡한 토끼들이 뛰노는 편지지만 쓰지 않는다면 수신자는 단번에 당신의 심미안을 알아볼 것이다.  물론 <루나리안 블루>를 소장할 정도로 안목 있는 당신이라면, 새벽의 눈밭 위로 스며드는 순백의 달빛을 닮은 종이 결로 유명한 <베네치안 비앙카 벨벳> 편지지 또한 보유하고 있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당신이 타이밍을 놓쳐 커피값을 계산하지 못했을 경우에도 미학적으로 뛰어난 편지는 큰 도움이 된다. 당신은 죄책감에 억지로 <다음엔 제가 살게요> 같은 말을 하지 않아도 되며, 편지지를 받아 든 상대 또한 품격 있게 포장된 당신의 거절 의사를 너그러이 받아들일 확률이 높다.

정중한 거절 편지의 마지막 이점은 감성이 풍부한 상대를 잡을 덫을 설치한다는 데 있다. 남자란 대개 허세나 가오 같은 것으로 가득 찬, 감성이 메마른 동물들이다. 당신이 이런 제국주의적 남성상에 취향이 없고, 아무 날도 아닌 어느 날 보고 싶었다는 이유로 손 편지를 건네는 상대와 교제하고 싶다면, 기회 될 때마다 편지 소쿠리를 심어두는 일은 충분히 괜찮은 전략이다.

감성에 젖은 참새 같은 남자는 서식 반경이 좁고 고립된 생활을 하는 습성이 있다. 이들을 포획하기 위해 곳곳에 소쿠리를 놓고 쌀겨 닮은 글자를 한 움큼 뿌려 놓는 식이다.

권위로 가득한 마초남이 소개 자리에 나왔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도 없다. 그야말로 당신의 소쿠리를 가장 크게 광고해 줄 든든한 조력자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당신의 편지는 미지의 동방 세계에서 전해진 진귀한 보배와 같다. 그는 난생처음 본 물건의 신묘함에 밤잠을 설칠 것이며, 술자리마다 당신의 편지를 지참해 전리품인 양 과시하고 떠벌릴 것이다(다만 이 과정에서 당신의 정중한 말투는 곡해되어 그의 자존심을 세우는 방향으로 각색될 확률이 높다).

그가 낀 모든 모임에 자신의 전과를 자랑스레 떠들다 보면 참새가 모이를 쪼는 일이 생긴다. 물론 당신의 취향이 변덕을 일으켜 전통적 마초남을 경험해 보고 싶다면 언제든지 그에게 다시 연락해도 된다. 감정에서 먼 사람일수록 감정을 갈구하는 법이다. 그는 여전히 당신의 편지를 잊지 않았을 것임이 분명하다.

편지 쓰는 여자를 싫어할 남자는 없다. 당신은 이곳저곳에 소쿠리를 놔두고 멀찍이서 바라보다가 참새, 뻐꾸기, 장끼, 마음에 드는 새가 들어온 순간 탁 하고 줄을 잡아당기기만 하면 만사 오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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