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에게 손편지 쓸 때 참고할 문장과 문구

쫄래쫄래 청사초롱 등불을 쫓는 작은 손자가

사랑하는 외할머니,

엄마가 어제 카톡으로 사진 한 장 보냈더라고요. 아빠랑 둘이 마당 텃밭 매고 계시던데, 아이고오. 쪼그려 앉아 계시니까 무슨 조약돌인 줄 알았어요. 분홍색 꽃무늬 티셔츠 아니었으면 못 보고 지나쳤을걸요. 참말로, 뒷 마당 장독대는 어떻게 쓰시는지.

고추 심겠다고 아빠 내려간 김에 밭 다 갈아엎고. 아까 엄마한테 전화해 보니 오늘은 죽순 다듬는다고, 가마솥에 물 한 솥 끓여 데치고 난리도 아니라던데. 매번 그렇지만 무리하시는 거 아닌가 싶다가도, 그래 그거라도 하시는 게 낙인데—하는 생각을 해보네요.

티브이나 보면서 쉬고 계시라고 해봐야 씨알도 안 먹히겠지만, 사실 말릴 것도 없죠 뭐. 저도 할머니 손자이니, 암것도 하지 말고 누워서 핸드폰이나 보고 있으라 해도, 반나절도 못 참고 뛰쳐나갈 게 뻔한 데, 할머니는 오죽하시겠어요. 꼬부랑 할머니 다 됐지만서도 여전히 밭매고, 시장에 내다 팔고, 사람들 만나 얘기하고. 몸은 되도 그렇다고 또 그거 안 하면 뭐 하겠어요?

저번에 다 같이 외삼촌 농원에 갔던 거 기억하세요? 숙현이는 해든이 안고 조수석에 타고, 뒷자리에는 할머니, 엄마, 아빠 셋이 낑겨 탄 날이요. 조금만 차를 타도 멀미를 하시니 멀리 못 가는 게 늘 아쉬웠지만, 그날은 모처럼 힘을 내주셨죠. 장성역에서 한별이 태우느라 잠깐 쉬었다 가서 그런가, 많이 힘들어하시진 않으셔서 다행이었어요. 물론 그 좁은 뒷자리에 네 명이 앉아 가게 되었지만요…

우리는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따라 초록빛이 가득한 고개를 넘었어요. 이름이 범재였나 밤실재였나. 고개를 오르며 엄마는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해줬죠. 읍내에 장이 서면 할아버지는 수레 가득 옷을 싣고 아침저녁으로 이 길을 넘어 다니셨다 했어요. 아스팔트며 가로등이며 아무것도 없던 시절, 은근 겁이 많은 엄마는 밤만 되면 고개가 그렇게 깜깜해 귀신 나올 것 같았다고 철 지난 호들갑도 떨었죠. 다들 떠난 장을 뒤로하고 불빛 하나 없는 고개를 넘었을 할아버지의 시간을 생각해 보네요. 참, 그러게요. ‘되던’ 날들이었죠. 웃기게도 저는 이상하게 그때가 그리워요. 살아본 적도 없으면서 말이죠.

이건 조금 딴 얘긴데, 쓰다 보니 떠오른 일이 있어요. 저번에 엄마랑 집에서 조기 구워 먹는데 아빠가 그러는 거예요. 할아버지는 조기 드실 때 이렇게 살을 안 발라 먹고 머리부터 통째로 드셨다고요. 아빠도 어지간히 신기했나 봐요. 하긴 저도 장인어른이 그렇게 드시면 몇십 년은 거뜬히 기억할 것 같더라고요. 조기 좋아하셨다는 건 많이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 이야기를 들으니 옆에 있는 것처럼 생생해져요. 제 기억 속 할아버지 얼굴은 월정 집에 걸린 환갑 잔치 사진 속 모습뿐이었는데, 감색 두루마기를 걸친 채 웃고 계시던 할아버지는 이제 시원하게 조기를 드시고 계시네요.

아무튼 농원에 가서도 한시도 가만히 안 계시더니만요. 분재 받침 밑에 난 잡초들 일없이 다 솎고, 그것도 모자라 하우스 한쪽 밭뙈기에는 아예 자리를 잡으셨죠. 네 시나 되어서야 징글징글한 대파 모종들 다 심으셨는지, 컨테이너 안에 넣어놓은 낡아빠진 소파 위에 쭈그려 누워 계시네요. 눈은 감고 계신 것 같아도 선잠만 주무시니, 다리라도 좀 편하게 놓아드리려 하면 “아이야, 괜찮아야.” 하시겠죠.

참말로 ‘되게’ 사셔요. 차마 그만하라고 말을 못 하는 건, 그게 할머니를 할머니로 있게 해주는 일이어서 그런 거겠죠. 일없이 편지를 쓴다거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해든이 목말을 태워 준다거나. 몸 좀 고생해도 저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쓰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낙이겠어요. 최씨 집안은 아니시니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무식하게 하시지는 않으시겠지만, 충분히 많이 하셨으니 이제는 쉬엄쉬엄하셨으면 좋겠다는 거죠 뭐.

불빛 하나 없는 고개를 넘는 아이에게 살며시 흔들리는 청사초롱 등불은 얼마나 반갑고 위안이 되는지. 할아버지부터 할머니, 엄마, 아빠, 늘 바지런하니 부산스런 삶으로 켜주신 등불이 제게 큰 힘이 되네요. 이제야 쫄래쫄래 뒤를 쫓는 저를 조금 더 지켜봐 주세요.

25년 5월 28일

작은 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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