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여보.
휴! 하마터면 산후조리원에서 여보 생일을 보내는 줄 알았어. 쑥 제때 나와 준 해랑이에게 고마워해야 하나. 그래도 제일 많이 고생한 건 여보야.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불씨처럼 번지는 생의 시작을 우리에게 전해준 여보는 정말 최고인걸. 전날 밤부터 물밖에 못 마셨으니, 배가 고파 해랑이를 밀어낼 힘이 없으면 어쩌지 하는 내 걱정과 달리 경력직의 노련함이었는지, 아니면 분만실의 침대가 슬슬 지겨워질 참이었는지, 진통이 오고 몇 번 힘을 주더니 쑥 하고 해랑이가 나왔더라고.
두 번째 방문이지만 분만실의 분위기는 여전히 강렬하단 말이지. 널찍한 연녹색 방에 덩그러니 놓인 이동식 병상과 진통을 측정하는 기계, 반듯한 격자무늬를 따라 모조 구름들이 인쇄된 벽지가 발린 천장. 그날 여보 눈에는 어떤 풍경이 스며들었을까. 우리는 같은 방에 있었지만, 그것은 분명 나와 달랐을 테니.
(사귄 거 말고) 우리가 처음 서로의 존재를 인식한 날로 치면 8년이 되어가네. 너라는 지평에 처음 닿은 날, 무수한 빗방울이 땅에서 솟아오르는 걸 보았지. 카나리아는 날갯짓마다 아래로 미끄러지고, 발자국이 걸음보다 먼저 찍히는 곳. 뒤바뀐 위아래와 나와 다른 좌표계에 한참을 헤맸던 기억이 나.
무언가 너를 서운하게 했던 날이었어. 왜 이곳은 내 세계처럼 흐르지 않는지, 나의 욕심과 기대가 일을 그르쳤고. 나는 새벽 세 시의 택시를 타고 너의 아파트로 향했지. 사랑이란. 부드럽게 흔들리던 놀이터 그네 위, 부둥켜안은 채 질질 짜던 그 밤을 떠올리니 오랜만에 낯이 뜨겁구만.
익숙했던 나침반을 내려놓기 위해 몇 번의 밤이 더 필요했어. 모든 것을 적시는 열대우림처럼 너는 나를 기다려줬지. 나는 이끼처럼 너의 세계에 안착할 수 있었고. 우리의 지평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였는지 더는 구분할 수 없었어. 내 안에 너의 시간이 흘렀고, 숨결 하나마다 정온과 벅참과 찬란함이 스며든 곳… 발이 닿을 때마다 내가 몰랐던 계절이 쏟아졌어. 앵둣빛 새들은 빛으로 번져 날아갔지.
<아내에게 프러포즈한 장소는? 셋, 둘, 하나!> 티브이 리포터의 돌발 질문에 오답을 남발하는 남편이라 해도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겠지만, 차라리 기념일부터 네가 요즘 빠져있는 수납 용품들까지 줄줄 꿰는 남편이 내 취향이긴 해. 경계가 허물어지고 지평이 물들었다 한들, 너의 남편인데, 너를 좀 더 잘 알아야 하지 않겠냐는 거지.
하지만 위대한 수학자들도 결코 풀지 못한 문제가 있으니, 그건 너를 얼마나 아는지에 대한 것이야. 내가 너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 백분율로 표시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건 납을 금으로 바꾸는 방정식과 같은 모습일 게 분명해. 비율을 알려면 전체를 먼저 알아야겠지. 전체를 안다는 건 너의 비밀스러운 언덕에 빠짐없이 입을 맞추고 이름을 붙였다는 뜻일 테고. 끝없이 번지는 빛의 과육의 끝에서 너의 모든 결을 헤아린 내게 백분율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찌저찌 내가 너의 해안선을 남김없이 걸을 수 있다 한들, 문제는 남아있어. 지도를 그리는 순간 쓸모없는 선의 집합이 되어버리는 곳. 다시 돌아온 시작점에서 뒤를 돌아보았을 때 내가 마주하게 될 건, 나의 걸음, 나의 노래, 나의 몸짓에 달라져 버린 너의 풍경일 테니까. 연금술의 길은 제 꼬리를 물고 끝없이 원을 그리는 뱀을 닮은, 두 개의 영원한 미궁임이 분명해.
사실, 너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어. 하하. 그래 놓고 <너를 좀 더 잘 아는 남편>은 어떻게 되려고 했던 건지. 얼마나 아는지, 영원히 알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푹 놓이는구만. 좋아 좋아.
그냥 너와 함께 있는 순간이 좋아. 아아, 부비동염. 오늘도 내일도 네 옆에서 부비적거릴 수만 있다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 너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안방에 놓인 캠을 켜 보니—해랑이 옆에서 멋진 자세로 낮잠을 주무시고 계시구만. 분홍색 양말도 야무지게 신고. 그저 사랑스러운 걸 보니, 여전히 너를 많이 좋아하나 봐. 그래, 그런 거 알아서 뭐 하겠어. 좋은걸, 그거면 됐지.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면, 네 곁에 있든 떨어져 있든, 태양이 눈 부실때 마다 너를 떠올리는 일뿐.
이렇게 늦어버린 생일 축하 편지라니. 내년에는 늦지 않고 쓰기로, 꼭꼭 약속해.
25년 7월 4일
너를 사랑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