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아버님께.
안녕하세요, 아버님. 숙현이와 함께 보낸 여름이 벌써 일곱 개가 되어가네요. 이제서야 이렇게 글 몇 줄을 씁니다. 조금 어색하기도 하고, 아버님도 ‘웬 편지’ 하실 것 같네요.
요즘 시간 날 때마다 편지를 한 번 써보고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라도 보내보려 하는데, 쉽지 않네요. 몇 번을 썼다 지우기만 하는지 참.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언제부턴가 우리의 말이 너무 가벼워진 건 아닌지. 주머니 속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마음속으로 몇 번을 되뇌던 날을 떠올려 보네요. 공중전화 투입구를 따라 찰그락 소리가 나면 가슴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긴긴 통화연결음으로 가득한 세상엔 귀 한쪽과 수화기만 남은 기분이었죠. 달칵 하고 들리는 착신음은 얼마나 반가웠던지. 수화기 너머 먼 목소리는 아련하니, 기쁜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시간은 강물처럼 흘렀네요. 언제 어디서든, 몇 초 만에, 한 푼도 안 되는 돈으로 온갖 말을 전할 수 있는 시절이 되었습니다. 하필 동전이 똑 떨어져 반환구며 바닥 틈새를 뒤져야 했던 누군가는 지금을 퍽 부러워할 것 같네요. 하지만 이 좋은 시절 속에, 우리가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지 않는 건 왜인지.
가끔 아버님께 카톡을 보내곤 했었죠. 별일 없으신지, 식사는 하셨는지, 인사 몇 마디가 고작이었지만요. 연락 한 통 없는 사위보다야 낫겠지만, 하얗고 노란 말풍선이 뜨문뜨문 박힌 카톡 창을 볼 때면 종종 생각이 들었습니다. 6년이란 시간 동안 저는 아버님과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음, 얼마나 가까워지려 했는지. 아버님과 제가 쌓은 여름은 몇 개일까 천천히 세어보았죠.
해든이도 태어나기 전, 아버님 집에 가 티브이를 틀면 꼭 <나는 자연인이다>가 제일 먼저 나왔어요. 낚시 좋아하시고, 술 좋아하시고, 시골 좋아하시고. 하지만 자연인이 되지 못해 늘 아쉬워하시는 아버님. 저번 주인가, 김천 할아버지 집 앞 냇가에서 수영하시는 사진을 봤어요. 빨간 반팔티 차림으로 흠뻑 젖으셔서는 활짝 웃고 계시던데요. 낚시도, 시골도, 한 번 따라가 볼 수 있었을 텐데 무슨 핑계가 그렇게 많았는지. 그나마 집에서 막걸리 한 잔 따라드리면서 듣는 아버님 이야기가 낙이었죠. 문제는 제가 영 술에 수완이 없는 녀석이라는 것이었고… 그래도 몇 안 되는 이야기 꼭꼭 기억하고 있습니다. “발에 걸려 넘어지는 건 작은 돌멩이다. 큰 바위는 돌아 지나갈 테니.” 같은 것들 말이죠.
낚시도 좀 같이 가고, 술도 팍팍 마셨으면 아버님과 더 많은 이야기를 했을 텐데. 낚시에 대해 아는 거라곤 곧은 바늘로 물고기를 낚았다는 강태공뿐이지만, 아버님과 세월이나 낚는 것도 퍽 즐거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버님을 따라 처음으로 흑염소 전골을 먹으러 간 날도 떠오르네요. 시뻘건 양념에 들깻가루가 수북하니, 맥주라도 한잔 마시면서 아버님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해든이를 품에 안고는 도저히 뭘 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것과 별개로 전골은 정말 맛있었습니다. 덕분에 안주만 실컷 축내고 온 사위가 되었습니다만…)
누군가를 많이 사랑한다는 건 그만큼 그를 알고, 기억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긴긴 겨울밤을 아버님 이야기로 가득 채울 수 있는 일, 할아버지 집 앞 호두나무가 해든이 해랑이 손에 열매를 쥐어 줄 때까지 아버님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일처럼 말이죠. 그래서 이렇게 편지를 써봅니다. 마음 하나 옮겨적는 게 이리 어려우니, 글을 쓰는 일은 참으로 고난입니다만, 편지를 쓰며 누군가를 떠올리고, 천천히 마음을 물들이는 건 무척 기쁜 일인 듯합니다.
가볍게 날아가는 이야기들과, 나풀거리는 관계들로 가득한 시절인데, 뭐 좋은 게 있다고 구닥다리 편지를 붙들어 보려는지. 딱히 돈 드는 것도 아니고, 받는 사람도 싫어하진 않을 테니, 적당히 좋은 일이려나… 시시한 구실 몇 개 붙여놓은 게 전부이긴 합니다. 뒷사람 문을 잡아주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려나요. 그래도 괜히 한 번 믿어보고 있습니다. 세찬 바람에 몸을 가누기 힘든 날이 오면, 이렇게 쌓은 시간이 저를 붙잡아주지 않을까. 그때 이 편지들이 제게 다시 말해줄 것만 같습니다. 제가 무엇으로 만들어진 사람인지, 그리고 무엇으로 만들어진 사람이 되어야 할지를요.
해든이다 해랑이다, 만나도 온통 정신이 팔려 이야기도 제대로 못 하는 시간이 항상 아쉬웠어요. 이렇게라도 가지런히 아버님과의 시간을 쌓아보고 싶었네요. 종종 편지 드릴게요. 건강 조심하시고요, 마음을 담아 보냅니다.
25년 8월 14일
아버님을 생각하는 사위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