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 많이 사랑하고 싶은 해랑.
눈을 감고 네 얼굴을 떠올려 봐. 두 개 이상 떠오르면 성공, 아니면 실패. 이번에도 실패야. 오늘 아침 현관문 너머로 엄마 어깨 위에 걸쳐있던 너의 얼굴 하나뿐이니까. 그것도 숙현이가 뒤를 돌아 네 얼굴을 보게 해줬으니, 결국 네 엄마 덕이지.
어쩌다 보니 요즘 계속 열 시가 넘어 집에 들어가. 집에 들어가면 너는 한참 자고 있지. 백일도 안 돼 통잠을 자주는 효자여서 참 고맙긴 하다만 말야. 네 불효자 형님은 갈수록 취침 시간이 늦어지고 있어. 예전에는 열 시만 돼도 큰일 나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열 시에 자는 날이 기적이야. 후다닥 씻고 네 형님과 조금 놀아주다 보면 나도 잘 시간이지. 그렇게 하루 삼십 분도 네 얼굴을 못 보는 날이 많아. 네가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날이면 한 번도 못 보지.
이게 맞는 걸까. 나는 물어야 할 것 같아.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짧은 시간 속에 선명히 물들 수 있을지.
네 엄마, 네 형, 그리고 너. 사랑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건 좋은 일일 거야. 내 시간과 내 머릿속 땅을 나눠줘야 할 곳이 늘어난다는 거니까. 비어 있어 봐야 허섭한 것들로 채워질 일밖에 더 있겠니. 하지만 집이 너무 많아 힘들다는 땅 부자의 말처럼, 나눠줘야 할 곳이 많은 것도 고민이 될 줄 몰랐어.
스물네 시간, 고작 스물네 평 남짓한 내 머릿속. 먹고는 살아야 하니 일 생각 좀 하다가, 요즘 네 엄마가 부쩍 점심을 부실하게 챙겨 먹는 것 같아 걱정 좀 하다가, 네 형의 가장 친한 장난감 친구들 이름 좀 외우다 보면 금세 집이 가득 차. 네 형이 어렸을 때만 해도 방 두 개에 화장실이 한 개니, 충분하다 생각했지. 하지만 이제 방이 세 개가 됐고, 네 방도 어엿하니 알차게 채워주고 싶다—그게 요즘 내 가장 큰 고민거리야.
해결책을 몇 개 내봤지만 별 건 없어. 시간의 점을 충실히 찍는 것, 눈 말고도 온몸으로 너를 기억하는 것 정도.
넓이가 안 되면 빽빽함이라도 늘려야 하는 게 세상 이치라고 배웠으니, 얼레벌레 흘러내리는 시간을 악착같이 주워 담아 보려고. 그래서 요즘 젖병을 물릴 때면 어떻게든 너를 놓치지 않으려 해. 핸드폰도 안 보고, 졸리다고 누워서 눈 감고 먹이지도 않고. 까만 눈동자 속 작은 무늬를 뚫어지게 바라보거나, 나풀대는 머리카락을 하염없이 쓰다듬어 보는 거지. 덕분에 나는 너에 관한 몇 가지 사항을 기억할 수 있게 되었어.
네 심기가 좋은 날이면 쪼옵쪼옵 경쾌한 소리와 함께 젖병 속 거품이 캐비어처럼 일어나. (지금도 그렇지만) 먹는 일에 크게 관심이 없어 영유아 검진마다 <추적 관찰 요망> 결과를 받는 네 형을 보아서 그랬을까. 한 방울이라도 더 먹이고 싶다는 생각에 너의 이 완벽한 식사 흐름이 깨질까, 나는 일 센티도 움직이지 않는 석고상이 돼. 기어코 목에 담이 와 그날 내내 고개를 삐뚜름히 기울여야 해도, 바글대는 철갑상어 알갱이를 보는 건 참 기쁘단 말이지.
또 다른 건 네가 왼쪽을 좋아한다는 거야. 그쪽이 편한 건지, 네 고개는 늘 왼쪽을 향해. 고개가 너무 돌아가면 공기를 마시게 되니, 나는 젖병을 들지 않은 다른 손을 받침대처럼 너의 왼 볼에 대어줘. 그러다 보면 심심해 손가락으로 너의 볼따구를 살살 간지럽혀 보는데, 하얀 밀가루가 푸짐하게 묻은 찹쌀떡처럼 말캉말캉한, 보드라운 그 감촉도 무척 좋았어.
온몸은, 그래, 네 형님과는 난리법석 온몸으로 놀아주지만, 너에게 내 몸은 아직 너무 크고 불편할 테니, 너를 울리지 않을 내가 가진 모든 작은 것들로 너를 기억하려 시도 중이야. 요즘은 코로 너를 기억하는 일이 즐거워. 정확히는 코끝이지만. 심심하면 코끝으로 너의 볼이며 말랑거리는 팔뚝, 투실투실한 허벅지를 눌러봐. 좋은 점은 냄새도 함께 기억할 수 있다는 거야. 다만 내 코가 둔한 녀석이어서 그런지, 티브이 광고처럼 꽃이 만발한 언덕이라든지, 쏟아져 내리는 달콤한 우유 냄새는 느껴지지 않더라. 오히려 담백하다고 해야 할까. 갓 삶은 면 보자기 같은 냄새가 나.
입술로는 너의 이마를 기억하고 있어. 편평하니 깨끗한 너의 이마. 너도 신기한지 내가 너의 이마에 입술을 맞출 때면 흡—하고 숨을 들이켜더라. 가끔은 이러다 침독 오르는 건 아닐까 싶어 입술을 말아 넣고는 인중과 앞니로 너를 기억하는 날도 있고.
새끼손가락으로는 너의 움켜쥠을 기억해. 뻗대는 것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손바닥에 새끼손가락을 좀 쥐여주려고 하면 어찌나 세게 주먹을 쥐고 있는지, 비비적대며 겨우 밀어 넣어야 해. 그렇게 고슬고슬한 손가락 다섯 개가 내 새끼손가락을 꽉 쥐는데, 안은 축축하니 생명이란 이런 건가 싶지.
그래도 가장 멋진 건 너의 눈매야. 별빛으로 떨어지는 혜성의 꼬리를 닮은, 혹은 바람에 일렁이는 보리알과 그 수염 같은 너의 눈꼬리를 나는 잊지 않을 거야.
이렇게 하면 우리는 이 짧은 시간 속에 선명히 물들 수 있을까. 짱구를 굴려봐도 이것보다 더 좋은 답을 내질 못하고 있어. 그렇다면 남은 건 이 두 가지라도 잘하는 것뿐이겠지. 알렉산더 대왕의 칼 같은 답이 세상 어딘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을 찾으려 다시 네 곁을 떠나기엔 너는 너무도 빠르게 자랄 테니까.
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아질 줄 몰랐어. 그저 나만 사랑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하룻밤 사이 집이 몇 채가 된 벼락부자가 이런 기분이려나. 좋으면서도 잘해야 하니 걱정이야. 틈날 때마다 잡초도 솎고, 종종 우수관도 뚫고, 잊을만하면 정화조도 비워줘야 할 테니까. 하지만 뭐가 됐든 오늘만큼은 잘했다고 생각해. 완벽한 답을 찾진 못했어도, 그 시간 속에 너를 생각했으니까.
너를 더 아껴주지 못해 고해성사를 하러 온 촌뜨기에게 자애로운 신부님은 이렇게 말할 거라 믿어. “이곳에 오셨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래그래, 이렇게 편질 쓰며 너와의 시간을 만들었으니까, 그걸로 일단 오케이인 거 아니겠어.
25년 9월 27일
너를 더 많이 기억하려는 아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