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우표 네 장이 손글씨가 적힌 종이에 붙어 있는 모습.

끝이 좋았으니
다 좋은 거 아니겠어

사랑하는— 이라 쓰고 싶지만 너무 식상한 것 같아 빼버리고 그냥 쓰는, 여보에게.

일찍 잤어야 했어. 괜히 뭐 더 해보겠다고 침대에서 개기다가 일이 터져버렸지. 한 시 삼십 몇 분쯤이었을 거야. ‘더 늦으면 내일 골골대겠군’이라 생각했던 기억이 나니까. 노트북을 덮고 불을 끄려 침대 발치로 가는데 문 너머로 소리가 들렸어. 하하, 아니겠지. 굳게 닫힌 작은방 문을 넘어 깜깜한 거실을 지나 안방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그의 옹알이. 처음엔 믿으려 하지 않았어. 아주 조금 믿고 싶지 않은 것도 있었고. 요즘 꼭 밤에 한 번씩 깬다곤 했지만, 서너 시쯤이라 했으니 잘못 들은 걸 수도 있잖아. 두 손으로 이불을 붙잡고 숨죽여 기다렸어. 설령 맞다 해도, 혼자 다시 잠들 수도 있는 거니까. 하지만 방문 두드리는 소리에 깨달았지. 문 앞까지 기어 왔음을. 음, 다시 혼자 잠들긴 글렀군. 거품은 산뜻하게 터졌고, 곤히 자는 여보와 해든이가 보였어. 그래, 이렇게 깨어있는데. 모른 척 잠든 척하는 건 너무 하잖아.

루시퍼가 천국의 문 앞에 선다면 이런 기분이겠지. 혹여 문을 열다 그의 심기가 언짢아지면 큰일이니, 온 힘을 다한 조심스러움으로 손잡이를 돌려 밀었어. 깬 지 얼마 안 됐었나 봐. 세상 서러운 울음을 터뜨리려는 기색은 아니었지. 이때다 싶어 후루룩 안았어. ‘아빠, 조금 늦으셨네요?’라고 속삭이는 듯한 눈빛을 애써 외면하며 서둘러 진자 운동을 시작했지. 그는 가까스로 품 안에 안착했어. 하지만 방문까지 이어진 험난한 여정에 잠이 다 달아나 버렸는지, 고개가 쉴 새 없이 움직이더라고. 음, 금방 자긴 글렀군. 아침밥을 먹으며 들었던 여보의 말이 떠올랐어. 새벽에 깨면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은 기본이라고? 이런, 안방에 핸드폰 두고 왔는데.

눈에 닿는 건 어둠뿐이었지만 어째선지 각성 상태였어. 왼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 최면용 회중시계처럼 정확히 같은 거리를 왕복하는 건 퍽 나쁘지 않았지. 머리를 비우고 반복하는 일련의 단순노동에서 오는 안정감 같은 거. 성가신 게 있다면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건지, 흐르고는 있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는 거였지. 유일한 닻이었던 한 시 삼십 몇 분은 캄캄한 문 뒤로 진작에 떠내려갔으니까.

가용할 수 있는 모든 감각과 논리적 추론을 종합한 결과, 삼십 분 정도 흘렀다는 결론에 도달했어. 때마침 그도 살짝 눈을 감기 시작했고, 아주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고, 경배하듯 그를 내려놓았지. 성공인가? 살며시 든 고개 위로 번쩍 뜬 두 눈이 얼마나 큰지, 밤보다 짙은 흑요석 한 쌍이 나를 내려보고 있더라고. 그는 번개처럼 뒤집어 천둥 같은 울음을 터뜨렸어.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허겁지겁 머리를 조아리며 그를 안고 일어서는 일뿐이었지.

드높은 천국을 떠다녔는데 땅바닥에 처박혔으니 화가 날만 해. 오른팔로 안았다가 왼팔로 안았다가, 토닥였다가 쓰다듬었다가, 상하 운동을 더해봤다가 빼봤다가. 칭얼거림도 쉽게 잦아들지 않더라고. 슬쩍 내려다보는데 눈이 마주쳤어. 한 번 더 섣불리 내려놓으신다면 진짜 크게 울겠습니다. 어쩌겠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흔들 수 밖에.

이번에는 달랐어.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고 되뇌고 싶었지만 팔도 아프고 눈꺼풀도 따끔거렸지. 몇 시일까, 두 시 반? 세 시? 제발 좀 자라. 그냥 눕힐까. 울든 말든 내버려두면 여보가 깨지 않을까. 못 이기는 척 넘겨버리면, 그러면 여기서 달아날 수 있지 않을까. 제발 좀 자라.

여보의 밤은 늘 이랬을 테지. 다른 게 있다면 그날은 양반이었고 여보는 저런 기대조차 할 수 없었을 거란 사실이고. 새벽에 가보면 기저귀가 똥으로 가득한 날이 태반에, 남편은 잤다 하면 업어 가도 모르니 애가 자지러지게 울든 말든 일어나지 않을 게 분명하니까. 그 뒤로 한 번 해랑이가 열한 시에 깬 적 있었지. 내가 여보를 이불 속에 억지로 밀어 넣은 건 그날 들여다본 여보의 밤 때문이야. 그저 여보가 편하게 잘 수 있다면.

여보의 밤에 더 가까워지고 싶어. 여보는 그대로 있어도 돼. 내가 여보 옆으로 더 가까이 갈게. 일찍 안 자길 잘했어. 끝이 좋았으니 다 좋은 거 아니겠어.

26년 1월 14일

우표 네 장이 붙은 한글 편지들, 태국 꽃 우표, 쿠바 자전거 우표, 브라질 아트 우표, 독일 스포츠 우표가 포함되어 있음.흰색 배경에 중절모를 쓴 부엉이 그림과 별 다섯 개가 위에 있는 파란색 배경의 흰 말 그림, 눈 덮인 야외 테이블 사진, 고풍스러운 궁전 사진이 나란히 놓여 있음.
파란색 필기체로 작성된 'lolettern' 텍스트 로고.